'강준만'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11/08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by 곰도리
  2. 2009/02/03 우리는 사이코패스와 얼마나 다른가 (3) by 곰도리
  3. 2009/01/12 독설닷컴 고재열을 위한 변명 (5) by 곰도리
  4. 2009/01/02 KBS ‘통합노조’새로운 실험 시작하나 by 곰도리

[주목! 이 주의 책] ‘전화의 역사’ 외

‘전화의 역사’ (강준만 / 인물과 사상사)

   
▲ ‘전화의 역사’ (강준만 / 인물과 사상사)
휴대폰 잃어버린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물에 빠져서 고장이 난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 기분이 어떨까요. 아시죠? 네, 참 짜증나고 난감하고 심정이 복잡합니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 - 그걸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아는 분들의 연락처는 모두 휴대폰에 저장돼 있고, 의사소통의 많은 부분을 휴대폰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이 없어졌을 때의 공허함이란 … 휴대폰 한번 정도 잃어버리신 분들은 그 느낌을 잘 아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휴대전화는 이제 ‘생활의 중심’이 됐습니다. 아니 ‘생활의 중심’이 아니라 휴대전화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사람과 휴대전화의 주종관계가 바뀐 게 아닐까요? 휴대전화는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이 됐습니다.

강준만 교수의 〈전화의 역사〉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린 휴대전화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1896년 우리 사회에 전화가 처음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전화의 ‘모든 것’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요즘 강준만 교수의 책들을 보면 대부분 생활사와 밀접한 관련이 많은데요 이번 〈전화의 역사〉 역시 그런 흐름의 연장선으로 보입니다.

사실 전화의 목적은 ‘소통’에 있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전화가 소통의 의미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정치·사회적인 의미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책에서도 언급이 돼 있지만 개화기 당시 전화는 ‘근대화의 상징’이자 ‘특권’이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는 ‘오락’으로 변했고, 휴대전화 보급이 일반화 된 2000년대에 들어서는 거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7가지 이유를 들어 휴대전화가 ‘신흥종교’가 됐다고 주장합니다. 7가지 이유가 궁금하시다구요? 〈전화의 역사〉를 보시면 그 이유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카스 R. 선스타인, 박지우,송호창 공역/ 후마니타스)

한국 사회는 다양성이 보장되는 사회일까요? 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된 민족’을 강조하고 ‘대동단결’을 좋아하며 ‘이질적인 것’에 대해 관대하지 않기 때문이죠.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 노골적 차별이 일어나는 것도 다양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선 다양한 의견이 조직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에너지로 작용하기 어렵습니다.

   
▲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카스 R. 선스타인, 박지우,송호창 공역/ 후마니타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는 어쩌면 한국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견이 없는 사회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이 모두 같을 수가 있나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며 사는 것이 바로 사회이고, 이견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이성적으로 조정할 줄 아는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겠지요. 이견이 없는 사회, 갈등이 없는 사회를 이상형으로 가진 지도자나 리더가 있다면 그 사회나 조직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성원들이 모두 지도자나 리더의 생각에 맞춰야 갈등이 발생하지 않을 테니까요.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는 이견을 다루는 방법에 주목합니다. 이견 없는 사회, 갈등 없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견과 갈등을 좋은 사회, 좋은 조직의 제도적 원리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시위참여자에 대한 검거열풍과 인터넷 검열 논란 등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한국 사회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사안이지 않을까요.

특히 5장 ‘언론의 자유’ 부분은 현재 한국 언론 상황을 고려했을 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은 많지만 특히 언론종사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식e5’ (EBS 지색채널e / 북하우스)

EBS 〈지식채널e〉라는 프로그램을 아시나요. 2005년 9월에 편성돼 2009년 현재까지 방송되고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e’를 키워드로 사람과 사회, 자연, 과학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5분밖에 되지 않는 영상이지만 〈지식채널e〉가 전하는 메시지는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요. 예민한 사회적 현안이나 쟁점 등을 핵심을 짚는 ‘영상언어’로 표현해 시청자들의 높은 호응을 얻었습니다.

   
▲ ‘지식e5’ (EBS 지색채널e / 북하우스)
〈지식채널e〉는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책으로도 유명합니다. ‘지식e’라는 시리즈로 출간이 됐는데요 지금까지 4권이 나왔습니다. 책은 프로그램과는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다른 느낌을 느껴보고 싶은 분들은 꼭 한번 읽어보길 권합니다.

이번에 출간된 다섯 번째 시리즈 〈지식e5〉의 특징은 사람에 초점을 맞췄다는 겁니다. 지난 5년간 방송되었던 프로그램 중에서 우리가 다뤄야할 인물과 삶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인 서울대 안경환 교수가 서문을 썼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 초점을 맞춘 책의 서문을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썼다? 뭔가 짚이는 부분이 있죠? 그렇습니다. 〈지식e5〉는 인권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안 교수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에 실린 스무 가지의 사연들은 저마다 고유한 아픔, 설움, 분노를 담고 있다. 시대의 상식에 어긋나고, 사람이 일용해야할 최소한의 양식조차 거부당한 이야기들이다. 읽고 듣는 사람의 마음은 무겁지만 이 무수한 통속通俗 속에 작은 희망의 싹들이 끊임없이 트고 있는 것이다.”

〈지식e5〉를 여러분에게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는 조선의 왕이로소이다’ (문효 / 왕의서재)

   
▲ ‘나는 조선의 왕이로소이다’ (문효 / 왕의서재)
〈나는 조선의 왕이로소이다〉는 일단 형식이 독특합니다. 조선을 이끌었던 ‘문제적 왕’ 10명과의 가상 인터뷰를 통해 우리가 흔히 역사라고 믿어왔던 ‘사실’들에 대해 의문을 던집니다. 가상공간에서 10명의 왕을 인터뷰하는 ‘사람’도 흥미롭습니다. 갑오농민전쟁 때부터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희생된 민초들의 넋을 기리는 가상의 캐릭터 ‘콩점이’가 저널리스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조선의 왕이로소이다〉에 등장하는 왕들은 다양합니다. 태종, 세조, 선조, 중종, 인조, 영조, 정조, 순조, 고종 등등. 다양한 왕들이지만 이들은 왕으로 재위할 당시 또는 왕이 되기까지 수많은 행적과 의문을 남긴 인물들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을 들게 만들더군요. “우리는 정말 조선의 왕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일까요. 〈나는 조선의 왕이로소이다〉는 이들 왕들의 인간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왕이라는 최고 권력자의 모습보다는 약점 많고 나약한,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었다’는 쪽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들도 알고 보면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이었다는 걸 책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학교도서관저널’ (2009년 11월 창간준비 1호)

재미있는 잡지가 하나 탄생할 것 같습니다. 〈학교도서관저널〉. 이 잡지는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이 발행인으로 있고 내년 3월 창간호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사실 창간준비호를 보면서 한기호 소장이 지난 몇 년간 매진했던 일이 이렇게 결실을 맺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학교도서관문화운동네트워크’ 공동대표로 활동해 왔는데요, 한국의 교육과 출판, 문화계가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해법으로 ‘학교도서관’을 생각했습니다.

사실 2003년부터 최근까지 정부가 학교도서관 활성화 계획을 추진하면서 학교도서관 설치율은 많이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설치율만 높아졌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도서관을 제대로 활용을 해야죠. 그런데 우리는 도서관을 잘 이용하고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의 교육은 입시전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교육의 내용이 대학 입시를 위해 존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육의 본래 목적은 물론 학교도서관 또한 입시교육을 위해 물리적인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 밖에 못합니다.

〈학교도서관저널〉은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창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학교도서관의 필요성을 환기시키고, 도서관 운영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려는 목적도 있구요. 우리 출판계가 위기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도서관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우려가 나오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저는 우리 사회의 높은 교육열에 비례해 우리의 지적인 문화와 교육 수준 또한 높은 것인지 가끔 회의가 들거든요.

〈학교도서관저널〉이 이런 고민들을 논의할 수 있는 공론의 장 역할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참 어려운 걸음을 내디딘 것 같네요.

‘한라산 편지’ (오희삼 / 터치아트)

   
▲ ‘한라산 편지’ (오희삼 / 터치아트)
오희삼 씨의 〈한라산 편지〉를 읽다 보면 제가 한라산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저자가 한라산의 세세한 부분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오희삼 씨는 15년 간 한라산을 일터로 삼아, 온 산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다고 합니다. 〈한라산 편지〉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인간의 눈’으로 본 한라산이 아닙니다. 한라산을 오르내리면서 깨닫고 발견한 꽃, 나무, 새, 물, 바람 등 자연이 주인공입니다. 한라산에 이렇게 많은 작은 생명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이들 생명의 신비로움을 7년에 걸쳐 기록을 했다고 하니 정말 그 ‘기록정신’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책은 읽는 게 아니라 보고 느낀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습니다. 글이 편지 형식인 데다 한라산에서 살고 있는 자연과 생명의 신비로움을 사진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시각적 효과가 상당히 큽니다. 특히 한라산 4계절의 변화무쌍한 모습이 사진에 담겨 있는데 보면 볼수록 장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인간인가’ (마이클 가자니가, 박인균 옮김 / 추수밭)

   
▲ ‘왜 인간인가’ (마이클 가자니가, 박인균 옮김 / 추수밭)
〈왜 인간인가〉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 즉 특별한 이유에 대해 과학적으로 탐색한 보고서입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저자인 마이클 가자니가는 뇌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석학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하네요. 이 책은 아마존에서 2008년 과학분야 올해의 책으로도 선정이 될 정도로 대중의 높은 관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과학서적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게’ 어렵진 않습니다. 인간의 뇌에 대한 생물학적 구조를 밝히고 이것이 인간의 삶을 특징짓는 여러 현상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규명하고 있지만 결론을 간단합니다. “우리의 뇌가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사실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뇌에 대한 경외감이 상당하다는 걸 여기저기서 느낄 수 있습니다. 저자의 결론은 간결하고 간단하지만, 이 책은 인간의 뇌와 그 뇌가 일으킨 여러 복잡한 구조의 진실을 찾아 떠나는 먼 여행과 같습니다. 책이 약간 두껍고 약간의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여행한다는 기분으로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여론조사, 과학인가 예술인가?’ (강흥수 / 리북)

   
▲ ‘여론조사, 과학인가 예술인가?’ (강흥수 / 리북)
〈여론조사, 과학인가 예술인가?〉는 여론조사의 효용과 한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책입니다. 사실 여론조사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여론조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치만 봐도 이는 잘 알 수 있죠. 대선 후보는 물론 총선에 나간 후보자들의 후보단일화를 결정할 때도 여론조사가 동원되는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론조사의’ ‘여론조사에 의한’ 정치시대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여론조사, 과학인가 예술인가?〉는 이런 현상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여론조사 결과가 정치적 의사결정의 최고 가늠자가 되고 있는 지금의 추세가 과연 온당한지를 묻고 있는 것이죠. 여론조사는 과연, 믿을 만한가. 지나치게 남용하거나 과신하는 건 아닌가. 여론조사가 우리 시대의 많은 문제들에 대한 ‘결정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저자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여론조사는 그 자체에 너무 많은 허점과 오류의 지뢰밭을 깔고 있다. 그래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엄밀하게 진단하는 과학이라 부르기엔 너무 불완전하다. 그러니 좀 더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활용하자. 그리고 더 정확한 여론조사를 위해 노력하자.

저자는 ‘제대로’ 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정말 여론조사를 ‘제대로’ 활용하기를 제안합니다. 저자의 제안에 동의하는 건 ‘독자’의 자유지만 어쨌든 여론조사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참고교재인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내가 보여?’ (전경남 / 사계절출판사)

   
▲ ‘내가 보여?’ (전경남 / 사계절출판사)
동화책 읽어보신지 얼마나 되셨나요? 전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최근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동화가 언급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동화가 주는 묘한 매력에 빠져 버렸습니다. 아! 동화가 정말 유익하고 교훈적이구나, 그리고 재미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전경남 씨의 〈내가 보여?〉는 고양이를 화자로 내세웠습니다. 화자가 고양이니까 고양이 세계가 주 무대인 셈입니다. 거기에 어느 날 ‘귀신 인간’ 승호가 나타납니다. 설정 자체가 재미있지 않나요. 고양이 세계에 나타난 귀신 인간이라니. 정말 이 세상이 고양이 세상이 되면 어떤 풍경이 그려질까 - 그런 생각을 하니 약간 무섭기도 하더군요.

〈내가 보여?〉는 고양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고양이 세계라고 해서 사람 사는 세상과 크게 다른 건 아닙니다. 특히 시험 때문에 제대로 놀지도 못하는 아이들의 심정이나 영어나 수학 등 각종 영재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어른들의 그릇된 생각을 꼬집는 부분은 유쾌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아이들만 읽을 게 아니라 어른들도 한번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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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곰도리

[취중진담] 사이코패스와 악의 평범성 

“아돌프 아이히만은 독일의 나치스 친위대 중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수 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한 혐의를 받은 전범이다. 그는 독일이 패망할 때 독일에서 도망쳐 아르헨티나에 정착했지만 1960년 이스라엘 비밀조직에 체포됐고 1962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뉴요커>라는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이 재판과정을 취재한 아렌트는 이 책에서 아이히만이 유태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렌트가 송고한 이 기사는 곧 미국 전역에 걸쳐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악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인물의 ‘악마성’을 부정하고 악의 근원이 평범한 곳에 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아이히만이 평범한 가장이었으며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모범적 시민이었다고 하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 그는 평소엔 매우 ‘착한’ 사람이었으며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한국인을 위한 교양 사전> 중 ‘악의 평범성’에서 인용, 강준만/인물과 사상사)

한나 아렌트 “악의 근원은 평범한 곳에 있다”

연쇄살인 용의자 강모씨. 언론과 전문가들은 그를 사이코패스라 말한다. 사이코패스 -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일컫는 이 말은 주로 사이코패스와 일반 사람들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할 때 쓰인다. 사이코패스 징후나 증상은 통상 이렇게 나타난다고 한다. 사기나 절도, 잦은 이직, 성적 문란, 가정에서의 무책임, 방화, 동물학대, 거짓말 등등.

언론은 통상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회적 병리현상 - 이를테면 연쇄살인, 아동 성폭력, 유아살해, 학교폭력, 집단 따돌림, 가정폭력, 집단 성폭행 등이 발생할 때마다 가해자를 일반인과 다른 분류로 취급해왔다. 주로 정신병자 아니면 사이코패스라 단정하며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정상적인 부류가 아니라 매우 돌출적인 인물이란 점을 부각시켰다. 이번 연쇄살인 용의자 강모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로 ‘단정되는’ 사람들은 ‘우리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일까. 쉽게 단정 지을 일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아이히만도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전범이었지만 동시에 평범한 가장이었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모범적 시민이었다. 더구나 평소엔 매우 ‘착한’ 사람이었으며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정신병자나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주변에서 매우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미 ‘위험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연쇄살인 사건을 개탄하면서 용의자 강모씨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언론도 이런 분위기에 용의자 얼굴공개 등으로 가세한다. 이해한다. 가족 잃은 슬픔을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희생자 가족의 슬픔과 분노는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갑자기 등장한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항상 ‘위험 사회’ 속에 살아왔고, 그것에 대단히 무감각한 채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해왔다.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가 <다시, 마을이다-위험 사회에서 살아남기>(또하나의 문화)에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타인에게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위험사회’ 속에서 살고” 있고,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끔찍한 사건의 범인이 되는 것을 끊임없이 목격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성폭행 사건의 85%가 피해자 주변의 아는 사람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은 ‘2007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여성부) 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소녀가장과 정신지체아를 집단 성폭행한 ‘아저씨들’은 사이코패스나 정신병자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집 주민들이었다는 것도 이미 여러 차례 언론보도를 통해 확인됐다. 밀양에서 발생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집단 성폭행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강력 범죄가 워낙 일상적으로 발생하다보니 지하철 성추행 사건의 대부분이 멀쩡한 회사원과 화이트칼라, 전문직 종사자라는 것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닐 정도가 돼버렸다.

이것 뿐인가. 운동선수에 대한 폭력, 군대 내에서의 구타, 학교에서의 폭력·살인 사건, 성범죄 연령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기사 등도 우리는 거의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의 가해자는 대부분 ‘누구의 이웃이며 남편이며 외삼촌이며 동네 이웃’일 가능성이 높다. 저 멀리 다른 세계에 사는 ‘우리와는 다른’ 사이코패스들만이 흉악범죄를 저지르진 않는다는 얘기다.

우리도 사이코패스가 될 수 있고, 그런 환경 속에 살고 있다

사이코패스를 우리와 다른 ‘특별한 존재’로 구별 짓고 그걸 전제로 해법을 모색할 경우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사이코패스적인 사회를 살아 왔고, 그것에 상당 부분 익숙해진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범죄 정도의 차이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지만, 지금까지 문제가 제대로 해결된 적이 있었던가.

용의자나 가해자 ‘개인’을 단죄하는 것이 이번 사건의 최종결론이 돼선 안된다는 것을 새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를 ‘위험 사회’로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짚어가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어떤 가해자’를 처벌하더라도 ‘제2의 사이코패스’는 또 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우리도 언제든지 ‘주변 환경이나 상황적 요인’에 따라 사이코패스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명심하자. 악의 근원은 평범한 곳에 있다.

<사진(위) 한국일보 2월2일자 3면 / (아래) 조선일보 2월2일자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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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곰도리

[취중진담] ‘공공적 연고주의’ 운동을 제안하며

1.

고재열은 <PD저널> 필진이다. 난 <PD저널> 편집국장으로 있다. 고재열 기자를 필진으로 ‘모신 건’ 글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자로서의 그의 진정성도 높이 평가한다. <시사저널> 파업과 이후 보여준 그의 행보에서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고재열 기자는 그렇다.

고재열 기자의 ‘고대 학벌주의’ 의혹(?)을 제기한 원성윤 기자는 <PD저널> 기자다. 나의 후배다. 혈연․지연․학연으로 얽힌 적은 없지만 내가 ‘아끼는’ 언론계 후배다. 기자 경력이 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지닌 문제의식과 감각은 높이 평가한다.

2.

‘그런’ 고 기자와 원 기자가 학벌주의를 가지고 논쟁(?)이 붙었다. 한 쪽은 문제를 제기하는 쪽이고 다른 한쪽은 방어하는 쪽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묘한 느낌이 든다. 적어도 내가 ‘아는’ 두 사람은 학벌주의와 모두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글을 모두 읽어봤다. 고재열 기자가 지금까지 썼던 글의 흔적들 가운데 학벌주의로 오해할 만한 부분이 있는가 - 이걸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쪽과 ‘억울하다’는 당사자의 항변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그게 핵심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이다.

문제는 학벌주의 즉 연고주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이 문제인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학벌주의는 주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마음 속으론 학벌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공공적 장소에서까지 학벌주의를 옹호하진 않는다. 그건 만인으로부터 손가락 받을 짓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게 연고주의고 학벌주의지만 적어도 사람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이 부분을 옹호하고 나서진 않는다. 학벌주의는 사적인 관계 속에서 은폐되기 쉽다. 학벌주의와 연고주의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3.

다시 고재열 기자 문제로 돌아가 보자. YTN 조승호 기자 후원모임을 결성한 고재열 기자의 ‘행위’를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학벌주의로 한 단면으로 볼 수 있을까. ‘독설닷컴’에서 보았던 고대 선후배들과의 사진과 ‘부분적인’ 글 등을 고대 학벌주의의 위험신호로 볼 수 있을까.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서러움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불편하게 느꼈을 법도 하다. 그건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술자리를 비롯한 사적 모임이든 공식적인 모임이든 출신대학들끼리 뭉치는 결속력은 서울 소재 대학 출신들이 강하다. 거기서 비롯되는 ‘챙겨주기’ 문화의 정도가 강한 곳 역시 서울 소재 대학 출신들이다. 특히 고대가 좀 유별나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학벌주의의 폐단에 고재열 기자의 ‘사례’가 포함될 수 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평소 학벌주의 폐단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보기엔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지만, 학벌주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확대해석하면 사실 해결이 어렵다. 툭 까놓고 말해 나 자신을 비롯해 우리 모두 가까운 사람들의 면면을 한번 살펴보자. 많은 경우 지연 혈연 학연으로 얽혀 있다. 이 말은 학연이나 지연, 연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말이다.

4.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실력이나 능력에 상관없이 출신 지역이나 출신 학교끼리 뭉쳐서 ‘잘살아보자’는 끼리끼리 문화이지, 일상적 삶에서의 사적 관계망까지 포괄하는 건 아니다. 그런 식이면 동문회와 동창회, 향우회 등과 같은 모임 자체를 없애야 한다.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어떤 일을 벌이고자 할 때도 같은 학교와 같은 지역 출신들은 일단 배제를 해야 하는 상황도 나온다. 이게 가능할까. 현실적으로 어렵다.

자신의 사적 네트워크를 돌이켜보면 같은 고등학교나 같은 대학 동문들이 많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다른 조건보다 같은 학교 출신이면서 ‘본인과 코드가 맞는 사람’이면 더 친밀감을 느낀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그걸 가리켜 누군가가 연고주의의 폐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을 한다면 동의할까. 쉽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기득권 사수를 위한 엘리트들의 학벌주의 연고주의는 비판해야 하지만 우리네 일상적 삶에서의 친목이나 우정까지 대상에 포함시키는 건 지나치다.

5.

질문 하나. 연고주의는 모두 나쁜 것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어차피 연고주의는 우리 삶의 법칙이 된 지 오래고 누구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다. 오죽하면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가 ‘공공적 연고주의’를 들고 나왔겠는가. 

어차피 우리가 연고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연고주의에 공공적 성격을 가미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같은 동문끼리 모여서 출세를 위해 패거리주의에 집착하지 않고, 언론개혁에 동참한다든가 사회봉사에 참여한다면 그 자체로 의의가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우려되는 점과 한계도 분명히 있다. 지방대 출신이 뭉치는 것과 서울대-연대-고대 출신들 특히 언론인들이 ‘뭉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한국 사회 기득권 세력에 다가갈 수 있는 확률이 후자가 더 높기 때문이다. 원성윤 기자의 고재열 기자에 대한 ‘고려대 뭉치기’ 우려 역시 이런 부분들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우려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해도 고재열 기자식의 ‘연고주의․학벌주의’라면 난 지지해줄 의사가 충분히 있다. 고대출신 언론인들이 모여 자기네들 출세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일’ 하겠다는 걸 비판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자기들끼리만 하겠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다만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정도는 고재열 기자도 알아줬으면 한다. 그게 우리네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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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곰도리

이 글은 <시사IN> 68호에 실린 글입니다.

KBS ‘통합노조’가 출범한다. 2009년 출범하는 12대 KBS 노동조합(위원장 강동구)이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과 공동 집행부를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 평행선을 달리다 못해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두 진영이 손을 잡았다. 왜일까.

서로의 필요성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KBS 조합원들은 강동구·최재훈 쪽에 승리를 안겨줬다. 하지만 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복합적이다. 이번 선거의 투표율은 95%, 승자(노조 당선자)와 패자(사원행동)의 표 차이는 66표다. 최재훈 KBS노조 부위원장 당선자가 말했듯 “이는 조합이 통합하지 않으면 공멸할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다.


무엇보다 이병순 KBS사장 취임 이후 경영진의 일방통행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만이 높게 나타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박승규 노조(11대)에 책임을 물은 구성원이 1979명(48.5%)이나 된다는 걸 가볍게 여기면 안된다. 강동구 새 위원장 당선자는 11대 노조 집행부로 참여하지 않았던가. 통합을 지향하지 않으면 반쪽 집행부가 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

사원행동 쪽은 어떨까. 비슷한 처지다. 이들은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경영진과 대립각을 세워왔다. 하지만 선거 패배는 사원행동의 이후 전망을 어렵게 만들었다. 집단적 노조 탈퇴 얘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언론법 강행에 따른 전국언론노조의 총파업 등 언론계가 긴박하게 움직이는 상황에서 이들이 노조라는 공간을 버리고 싸움을 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사실 통합보다 중요한 건 성공 여부다. 솔직히 확률은 낮아 보인다. ‘통합노조’의 깃발은 올렸지만 아직 두 진영 사이에는 신뢰의 문제가 남아 있다. KBS 현안부터 방송법 개정에 이르기까지 분명한 인식차도 존재한다. 한마디로 대내외적 변수에 따른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언제든 ‘분리 독립’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번 ‘통합노조’는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그동안 반복해 왔던 승자 독식주의를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가장 주목한다.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방송의 공정성을 둘러싼 갈등이 점차 격해지고 있는데, 문제는 그 격함이 노조선거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KBS 사장 선임은 물론 역대 노조 선거가 첨예한 갈등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KBS는 한국 정치의 복사판이다. 노선이 다른 진영 간 사활을 건 경쟁은 기본이고, 심지어 이긴 쪽의 성향에 따라 반대쪽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되는 경우도 있었다. 역지사지나 승자의 포용을 기대하는 건 사치에 가까웠다.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과)가 지적한 것처럼 “시청자들에게 좀더 좋은 방송을 제공하기 위해 애써야 할 사람들이 엉뚱하게 힘을 쏟아 붓고 있으니 답답할” 정도다.

KBS가 특정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듯 노조 역시 특정 구성원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선거 결과에 따라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전면 부정하는 행태가 지양돼야 하는 이유다. 선거 공로에 따른 논공행상 자리배분도 최소화 시켜야 한다. 그래야 공영방송 노조의 위상이 새롭게 정립될 수 있다.

당선자 쪽에서 승리감에 도취되지 않고 이번 선거결과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물론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같은 시도가 KBS와 노조 역사에 새로운 실험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KBS ‘통합노조’의 출범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이유다.

<사진 : 지난달 31일 언론노조 집회에 참석한 KBS 조합원들. 왼쪽부터 민필규 KBS 기자협회장, 최재훈 KBS 노조 부위원장, 강동구 KBS 노조위원장, 정조인 KBS 기술인협회장 ⓒPD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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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곰도리